성장 제일주의의 유산이겠지만, 박정희에 비판적인 한국 정치인까지도 박정희만큼이나 외화로 표시되는 “우리들의 성장 통계”를 참 좋아한다. 1990년대에 “국민소득 1만달러”는 주류의 자랑거리였으며, 2000년대의 자유주의 정권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어간다고 자화자찬했다. 현재 대통령이 “머지않아 3만달러, 4만달러 시대가 온다”는 것을 확약하는 걸 보니, 자유주의 온건 우파든 극우파든 외국돈으로 표시된 숫자에 대한 사랑은 마찬가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영업 하거나 중소기업에 다니는 다수 한국인들의 주머니 사정에 그다지 큰 직접적 영향을 주지도 않는 소수 재벌들의 수출 성과에 좌우되는 외화 표시 1인당 국민소득의 통계는 과연 한국 사회의 진일보를 제대로 반영하는가? 필자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사회 상식의 변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진보의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의미에서도 한국 사회가 지난 수십년 동안 커다란 긍정적 변화를 보였다는 것도 필자가 스스로 목도한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가 한국 사회를 최초로 체험한 19년 전에는, 절대다수의 한국인에게는 동성애는 “변태”였으며, 군에서 살인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감옥에 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광신도”나 “또라이”에 불과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동성결혼이 가능해진 것도 아니고 무기를 들지 않을 사람들을 위한 대체 복무 제도가 신설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시민사회에서는 성소수자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상식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돼야 될 “의제”의 일부가 된 것이다.
즉, 국가는 구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사회의 상식이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생들을 성희롱하는 저질 교수들을, 그때나 지금이나 “상아탑”이어야 할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1993~1998년간 서울대 우 조교의 법정 투쟁 등 성희롱 관련 사건들을 경험한 오늘날 사회에서 성희롱이 범죄라는 상식이라도 점차 굳어져 가고 있다. 인권 상식이 발전돼 가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진정한 의미의 진보이자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 인권 상식은 충분한가? 전혀 그렇지 않으며,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인권이 부단히 유린된다는 것은 필자의 생각이다. 요즘 들어 학교 체벌과 같은 유형의 폭력은 그나마 비판적 시선을 받기에 이르렀지만, 다수가 일상적으로 당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하는 가장 무서운 무형의 폭력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다. 이를 “우리 경제 사정으로서는 불가피하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렇다면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은 폴란드나 헝가리, 멕시코에서마저도 노동자들이 연간 2316시간이나 일하는 한국 노동자보다 400~500시간이나 덜 일한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수진영에서 “고비용 저효율 구조”라고 엄살을 떨지만, 국제 통계를 보면 한국 근로자의 소득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63%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이 다수를 점하는 한국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노동을 견디면서도 보수다운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보수진영에서 “강성 노조” 타령을 일삼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이 이렇게 당하면서 살게 된 이유는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잔업시간 단축을 요구할 만한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더 정확할 것이다. 저들이 하루마다 파김치가 되는 몸을 쉬게 할 시간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최악의 인권 침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억울한 일이다.
보수진영은 유독 북한을 공격할 때에 인권을 들먹이지만, 평일에 자녀와의 대화라도 나눌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에게는 인권이 있는가? 초(超)인간적 희생을 요구하는 장시간 노동이 바로 구타나 폭언만큼의 인권 유린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돼야 좀더 나은 사회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